1. 종족전쟁

온게임넷은 2000년에 개국했다. 그런데 1999년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때가 최초의 스타크래프트 대회가 열렸던 해이기 때문이다. 99년 3월 KPGL배 하이텔 게임넷 리그가 전설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 대회의 성공에 고무되어 나온 것이 99년 PKO(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이고, 많은 이들이 이 대회를 최초의 스타리그로 기억한다. 투니버스의 제작진들이 장난처럼 시작한 게임 중계가 대회로까지 커져 버린 역사적 순간이다. 온게임넷을 회고하는 것은 따라서 기억의 습작이다.

<온게임넷 스타리그>라는 정식 명칭은 2000년 ‘하나로통신배 투니버스 스타리그’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온게임넷이 게임 전문 방송국으로 개국하게 되어 ‘프리챌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주관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해 후반이다. 엄재경 정일훈 김태형 3인으로 이뤄진 ‘엄정김’ 3인방이 해체된 것도 3인방 중 정일훈이 온게임넷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하차하던 이때부터이다. 이후 ‘엄정김’은 전용준 캐스터의 합류로 ‘엄전김’ 3인으로 재편된다. 이 체제를 기반으로 스타리그는 10년 천하를 누리게 된다. 온게임넷의 성공에 고무되어 MBC도 게임 채널을 만들어 스타리그를 운영했다. 그러나 온게임넷은 ‘창업 군주’로서의 권위를 유지했다.

그렇게 e스포츠는 세상을 향한 비행을 시작했다. ‘쌈장’ 이기석은 당시 성공한 연예인의 척도라 할 수 있는 텔레비전 광고모델로 발탁되기도 하였고, 대중들은 이기석을 보며 프로게이머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고, 수많은 청춘들은 자신의 미래에 게이머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어색한 유니폼과 우주공간을 연상케 하는 경기장의 세트는 여전히 조악한 수준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광안리’ 사건이 터졌다. 2004년 스카이프로리그 1라운드 결승전이 광안리 해변에서 열렸고, 경찰은 이날 관객 수를 약 10만으로 추산했다. 같은 날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관중이 1만 5천 명의 관객을 수용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10만이라는 숫자는 희망과 환상이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수의 게임 팬들이 스타리그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어두컴컴한 피시방에서 숨죽이며 즐기던 그들이 당당하게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광안리 대첩은 따라서 게임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아니 존재를 거부당했던 하나의 종족이 광안리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사건이기 때문이다. 초기 e스포츠의 종족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 자유의 날개

그러던 온게임넷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후 라이엇 게임과 협력하여 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를 탄생시켰지만, 한번 걷기 시작한 내리막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2019년 이후 온게임넷은 재방송 중심의 ‘추억 창고’ 역할을 하는 수준으로 작은 규모를 유지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 2023년 현재 온게임넷은 OPGG의 남윤승 대표가 인수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 중에 있다. 스타리그의 산실, 아니 전세계 e스포츠의 창조주 온게임넷이 20여년 만에 맞이한 현실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게임 산업 자체가 내리막이었을 수도 있다. 2022년 롤드컵은 대회 역사상 최다인 510만의 순간 최다 시청자 수를 기록했다. 산업이 죽었다고 하기엔 너무도 좋은 실적이다.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식었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게임이니까 인기가 식는건 당연하다. 그런데 한가지 게임이 10년이 넘게 인기를 누리는 경우 또한 매우 흔치 않다. 저작권 문제, 승부조작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로 인한 위기를 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다른 스포츠에는 없는 이야기들인가? 아니라면 왜 스타리그만 망했단 말인가.

먼저 게임을 중계한다는 사업모델 그 발상 자체부터 따져 보자.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는 e스포츠(E-Sports)가 되겠다. 게임을 중계방송으로 제작하고 방송하여 수익을 올린다는 게 사업모델의 골자가 되겠다. 시청자가 남이 하는 게임을 봐야 할 이유, 이것을 제시해야 하는게 게임 전문 방송채널의 첫번째 사명이다. 게임전문채널이 내세워야 할 가치제안(Value proposition)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야구장에 가면 수많은 직관러들이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중계방송을 함께 본다. 경기장까지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중계방송을 보는 또다른 재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는 어땠을까. 남윤승 대표는 이에 대해 ‘스타리그는 정적인 스포츠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동적인 매력을 창출하기 위한 연출이 필요했다’라고 회고한다. 가만히 앉아서 자판과 마우스를 조작하는 ‘정적인 활동’을 중계하려면 뛰고 달리는 기존 스포츠에서 느낄 수 있는 ‘동적 재미’를 연출력으로 창조해 내야 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남윤승 대표는 이어 게임 중계는 스포츠 중계보다 방송 쇼프로 연출에 가깝다고 했다. 선수들의 플레이에 방송이 끌려가는 스포츠 중계와는 달리, 선수의 캐릭터 설정과 같은 부분에서 게임 중계의 매력을 지적한 것이다. ‘테란의 황제’, ‘폭풍저그’, ‘투신’과 같은 캐릭터를 만들고 ‘임진록’이라는 라이벌 구도, ‘가을의 전설’이라는 프로토스 투쟁사와 같은 서사를 불어넣어 모니터속 게임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연출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남윤승 대표의 말처럼 정적인 스포츠는 중계가 힘들다. 아니 중계의 가치, 즉 시청자가 봐야 할 이유를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모든 정적인 스포츠는 재미가 없을까. 시야를 넓혀 보자면, 바둑은 어떨까. 바둑이야말로 문외한에게는 잠이 오는 종목이다. 소리를 내며 응원할 수조차 없고, 중계진도 숨죽여 속삭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은 고정적인 팬을 확보하고 있고, 심지어 ‘전문 방송 채널’이 존재한다. 따지고 보면 바둑은 스타크래프트 같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과 어쩌면 가장 유사한 종목일수도 있겠다. 바둑이 된다면 스타크래프트도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역동성에서는 게임이 앞서며, 상대적으로 짧은 경기 시간, 다전제의 가능성 등으로 인해 광고수익 창출에도 유리한 환경이다. 사업모델 자체는 그럴 듯 했다.

재정전략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90년대 어느 날 신문 한쪽에 자그마한 기사로 ‘프로게이머’라는 신종 직업이 등장했을 때 모든 이의 질문은 한 가지였다. 게임을 해서 돈을 번다고? 프로‘대회’급 행사를 한다면 아무 데서나 볼 수 없는 수준의 관전체험을 보장해야 한다. 그와 같은 업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프로게이머’라는 직군의 등장은 따라서 ‘필연’이며, 진정한 프로에 걸맞는 규모의 자본 투자는 선결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프로스포츠의 경제학이다. 이때 투자금 조달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방송사가 직접 제작비를 투자하는 경우다. 기성 방송이 다루는 콘텐츠는 광고 수익으로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게임넷의 경우는 달랐다. 방송사 자체가 스타트업 수준이었으며, 스타리그가 방송사의 거의 유일한 컨텐츠였기 때문이다. 스포츠 대회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방송 쇼 프로 제작과 유사한 상황이라 관중수익은 창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입장권 경쟁이 치열한 공개 가요프로그램들이 유료 관객을 받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관객이 손님이 아니라 방송제작에 필수적인 콘텐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야구와 축구처럼 뷰어쉽 기반의 규모의 경제학이 미지수인 만큼 고액 광고를 유치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대형 기업의 후원을 받아 운영하는 방식, 즉 스폰서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름없는 신인 화가, 무명가수, 암벽등반과 같은 비인기 스포츠 종사자들에게는 매우 흔한 방법이다.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e스포츠 최초의 단체 온게임넷에게 스폰서 제도는 다소 강제된 면이 있지만, 사업이 최초 자리잡는 과정에서 피시방을 벗어나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게 도와준 ‘자유의 날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군단의 심장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 내리막의 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스타리그의 산업적인 측면을 봐야 한다. 스타리그를 e스포츠라는 산업으로 보자. e스포츠는 포괄적으로 흥행산업에 속하며 이 산업에는 다양한 종사자가 참여하여 가치사슬(value chain)이라는 매개를 통해 각자가 할 수 있는 역할로써 고객 만족에 공헌하게 된다. 온게임넷은 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 소비자에게 콘텐츠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니 ‘분배자(distributors)’의 역할을 자처했다. 그런데 대회를 주관하고 콘텐츠를 생산했으니 ‘생산자(creators)’이기도 하다. 한때 공중파 방송국이 드라마를 제작도 하고 방영도 하던 시스템을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생산자로서 온게임넷이 간과한 것이 있다. 콘텐츠 제작을 위한 핵심적 자원(resource), 즉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제작한 블리자드의 몫이다.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학자 마이클 포터가 제시한 다섯 가지 산업 경쟁요인 모델에 따르면 어떤 산업에서 공급자(suppliers)가 완제품의 핵심적인 부품이나 자원을 독점적으로 제공한다면, 그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공급자가 된다. 블리자드(suppliers)와 온게임넷(buyers)은 포터가 지적한 바로 그런 관계였던 것인데, 다만 온게임넷은 공급자와의 협의 없이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온게임넷이 스타리그를 운영한 덕분에 블리자드는 어마어마한 홍보 효과를 누렸을 것이다. 10년에 걸쳐 총 34회의 스타리그 대회를 운영한 효과로 인한 매출은 두가 지로 나뉜다. 우선 판촉 효과로 인한 매출 증가가 기본이며, 피시방 라이센스 이용료와 같은 뜻밖의 ‘수익원’까지 더 한다면 블리자드는 온게임넷에 큰 은혜를 입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온게임넷과 블리자드는 e스포츠라는 산업에서 상호의존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가 갈라졌을 때 감내해야 할 손해는 온게임넷 쪽이 절대적으로 컸다. 블리자드는 광고효과를 잃겠지만, 온게임넷은 대회를 접어야 하기 때문이다. 편익이 줄어드는 것과 존재론적 위기를 맞는 것은 한 차원이 다른 상황이다. 전략적 차원에서 상호의존적이었을지 몰라도 법적 차원에서는 온게임넷이 블리자드에 완전히 종속된 관계였기 때문이다. 1차 저작권 보유자인 블리자드 말고도 또 다른 종속이 있었다. 스타리그가 후원사의 재정적 지원에 기반하여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원사의 후원은 ‘믿음과 신뢰’의 경제학에 기반한다. 편익의 정도는 금액의 규모에 영향을 미치지만, 손해는 그 자체로 후원의 철회를 촉발시킨다. 따라서 후원의 경제학은 편익추구적(benefit-seeking)이라기 보다는 위험회피적(risk-avoidance)이다. 따라서 피후원자가 후원자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편익에 대한 기대보다 우선하게 된다. 대박을 치지는 못하더라도 후원자를 망신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원에 의존하는 산업일수록 ‘공적 인식(publicity)’의 문제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아니 게임에 대한 대중이 가졌던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90년대라는 세상에게 게임이란 무엇이었을까. 게임은 아이들의 인생을 갉아 먹는 나쁜 존재였다. 부모님의 걱정거리였고, 없앨 수 있다면 없애고 싶은 그런 존재였다. 비디오게임의 과몰입성을 빌미로 집요하게 임요환을 몰아부친 ‘아침마당 임요환’ 사건은 그런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청소년은 ‘게임 셧다운제’라는 것을 겪게 되는데, 이미 90년대 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의 게임 시간을 제한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었다. 이렇게 서슬이 퍼렇던 시장에 철모르고 뛰어든 게 온게임넷 창업자 양반들이었던것이다. 게임중독, 피씨방폐인, 청소년 문제 등등 모든 사회악의 핵심적 존재였던 게임을 응원하고 믿어줄 기업가가 있을까. 한빛소프트, 네이트와 같은 젊은 기술기업은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 것들을 스폰서하는 기업은과연 무엇을 기대했을까. 물론 편익을 기대했던 스폰서도 있다. 3년이나 대회의 메인 스폰서를 자처했던 ‘신한은행’의 경우 청소년 시기에 계좌를 열면 평생고객이 된다는 점을 노린 전략적 접근이었던 것이라고 남윤승 대표는 회고했다. 스타리그가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되자, 젊은층의 인기에 민감한 기업이 스폰서를 자처하며 심지어 정치인들도 얼굴을 비추는 경우가 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게임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몸을 웅크린 채 스타리그의 성공의 그늘에서 늘 위협적인 존재로 숨어 있었다.

부정적 편견에 맞서는 흥행사업이 e스포츠만은 아니다. 미국의 격투 스포츠 단체 UFC 역시 미국에서는 야만스럽고 폭력적인 스포츠라는 편견의 피해자이다. 일례로 미시건주립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딕슨이라는 학자는 2015년 Public Affairs Quaterly라는 학술지를 통해 ‘이종격투기는 길거리 싸움과 다르지 않다’는 비난을 가했을 정도이다. 게임이나 이종격투기나 모두 비주류 문화로써, 소외된 장르, 남성중심적 문화가 횡행하는 반사회적 행동이라는 편견의 피해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UFC는 꾸준히 노력해왔다. 초창기 완전 무규칙이던 경기 방식으로 인한 야만성 및 안전성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경기 규칙을 바꿔야 했다. 폭력성으로 인해 방송금지 처분을 당할 정도였으니, 유료티비(PPV, pay-per-view) 서비스 수익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단체에게는 어느 정도 강제된 면도 있었다. 블리자드가 스타크래프트를 청소년 등급을 받기 위해 교전 후 화면에 등장하는 피를 검은색으로 바꾼 대목이 연상된다. 맥그리거 같은 이종격투기 수퍼스타가 복싱스타 메이웨더와 복싱룰로 친선경기를 가지는 것도 ‘복싱급 주류스포츠’로 편입했음을 호소하기 위한 UFC의 인정투쟁이라 볼 수 있다. UFC가 1993년에 시작되었으나, 그들의 투쟁 또한 이제 30년이 꽉 찬 셈이다. 부정적 인식을 불평하기보다는 인정하고 변화하려는 노력을 통해 주류문화로의 승격을 시도한 것이다. 이를 거부하면 리그 자체를 접어야 할 수 있다는 것을 ‘방송금지’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결과일 것이다. UFC는 2022년 기준 연 3억불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매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스타리그를 위협한 두 가지 위기를 살펴보았다. 산업적 이유로 저작권의 위기, 그리고 승부조작의 위기가 그 두 가지였다. 그런데,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 보자. 스타리그를 종식시킬 수 있는 법적 지위와 파워를 가진 존재가 있었다면 그것은 블리자드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블리자드는 KeSPA와의 협상을 통해 스타크래프트2의 리그를 출범시켜 전략적 파트너로 스스로의 역할을 정립했다. 오히려 스타리그를 무너뜨린 것은 조작스캔들이었고,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내부자들이었다. 10여년 간 차별과 오명을 씻기 위한 선배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한 순간 푼돈의 욕정에 팔아먹은 것이다. 형이고 동생이며 동료이며 미래인 줄 알았던 그들. 그들이 등 뒤에서 찌르자 스폰서들이 발을 빼며 스타리그는 무너졌다. 위대한 제국은 내부에서 무너진다고 했던가. 스타리그의 성공은 이와 같은 부정적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일궈낸 결과 였던 것이다. 그러나 게임을 둘러싼 부정적 시각은 성공의 그늘 뒤에 숨어서 줄곧 따라 다녔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전쟁은 인정투쟁이었고 광안리 대첩은 세상에 대한 전쟁선포식이었던 것이다. 게이머는 사회악이라는 편견에 대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게임은 사회악, 게이머는 사회적 낙오자라는 의심은 승부조작스캔들이 터진 순간 확신으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조작은 반역이었고, 자명고를 찢는 배신이었다. 조작범은 크게 성공했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처럼. 공적인식(publicity) 라는 ‘군단의 심장’을 찔렀기 때문이다. ‘게임 폐인 녀석들이 그러면 그렇지’ – 조작범들이 확신을 준 것이다. 그렇게 스타리그의 코드를 뽑은 것이다.

4. 공허의 유산

온게임넷은 부활할 수 있을까. 현재 남윤승 대표의 지휘하에 온게임넷은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 중이다. 온게임넷은 부활하였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데 스타리그는 부활할 수 있을까. 게임대회를 중계하는 흥행산업이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 다시 산업구조를 관찰해보자. 공급자(suppliers)가 힘을 가진 산업에서는 공급자가 제작자(manufacturers or creators)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배분자(distributors)가 되기도 한다. 한 개의 영향력 있는 회사가 다양한 역할을 통합(integration)하게 된다는 것이다. 게임대회라는 최고의 흥행산업을 창조해 낸 것은 온게임넷이 맞다. 그런데 이 산업의 주요 공급자, 즉 게임제작사들이 대회를 열기 위해 굳이 방송사라는 파트너가 필요할까. 시계를 돌려 현재를 보면 답이 나온다. 이후 온게임넷은 LCK를 탄생시켰지만, 라이엇게임즈(Riot games)와 제휴를 맺어야 했다. 이어 2019년 부터는 라이엇게임즈가 직접 중계를 주관하기 시작했다. 공급자의 위치에 있던 게임사가 콘텐츠의 제작및 배급까지 통합(integration)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버워치 및 배틀 그라운드의 중계권마저 놓치게 되었다. 방송사라는 파트너의 산업 내 지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방증이다. 미디어 지형도 바뀌었다. 방송사가 중계를 독점했던 90년대와 달리 트위치, 아프리카 티비등 개인방송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 현재이다. 소위 크리에이터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형국인 셈으로 고비용구조에 기반한 방송사가 비교열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e스포츠라는 산업체에서 방송사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e스포츠 산업의 쇠락을 레거시 방송사들의 쇠락과 같은 결로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미국의 경우 기존 케이블 방송을 거부하고 스트리밍 서비스로 컨텐츠를 소비하는 행태를 일컽는 소위 ‘코드커터운동’(cord cutter movement)이 등장하기도 했으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흐름에도 불구하고 날씨, 뉴스, 스포츠 중계와 같이 실시간 감상이 중요한 콘텐츠들을 따로 꾸려 패키지로 제공하는 슬링티비(SlingTV)의 등장은 실시간 콘텐츠의 가치를 확인시켜 주는 방증이다. 전통적 미디어 시장의 위기라는 현상으로 게임 중계산업의 쇠락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게임중계는 실시간 콘텐츠로서 독창적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2000년대 중반 프로리그의 중계권을 대기업 구단 협의체인 KeSPA에 넘겨준 적이 있었다. 구단들이 선수들의 개인리그 출전을 막겠다고 한 보이콧 압박에 밀렸기 때문이었다. e스포츠를 창조한 것은 온게임넷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서서히 약화되고 있던 것이다. 온게임넷이라는 사업체의 잘못이 아니다. 산업구조라는 외부적 요인이 문제였던 것이다.

스타리그를 돌이키다 보니 참으로 많은 스타트업의 모습이 보인다. 위대한 도전으로 전에 없던 사업 모델을 만들어서 크게 성공한다. 그런데 성장을 위한 도약과정에서 넘어진다. 많은 스타트업이 그렇게 사라졌다. ‘기업창업가 매뉴얼’의 저자 스티브 블랭크는 스타트업을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 하는 임시 조직이라고 정의하였다. 어쩌면 스타리그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했던 투니버스의 그들은 그 자체로 임시조직으로서 스타트업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스티브 블랭크에게 영감을 받아 ‘린스타트업’이라는 책을 쓴 에릭리스에 따르면 스타트업은 시장 실험과 반복을 통해 사업모델을 개발한다. 이때 스타트업은 최소기능 제품(MVP. Minimum Viable Product)을 출시하여 사업의 시장성을 검증한다. 투니버스가 시행했던 게임대회는 어쩌면 MVP였는지 모르겠다. 다만 시장의 환경적 요인에 대한 검증이 아쉬웠다. 저작권이라는 법률적 환경 요인 및 1차 저작권자라는 결정적인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권한을 과소평가한 점은 음악 저작권자라들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던 냅스터(Napster) 혹은 그루브샤크(Grooveshark)등 이제는 사라진 초기 음악 스트리밍 사업들의 사례가 연상된다. 그들에게 온라인이라는 세상은 저작권의 치외법권이었을지 모른다. 게이머들에게 피시방도 자유의 공간이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 나왔으니 위험 관리라는 새로운 분야가 중요해진 것이다. 파이트클럽같은 지하세계에서는 폭력성이 전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싸움꾼도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면 이미지관리가 필수적이다. UFC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냅스터와 그르부샤크가 실패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애플뮤직, 스포티파이와 같은 균형잡힌 형태의 스트리밍 뮤직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었을까. 온게임넷 스타리그라는 MVP 가 없었다면 LCK라는 세계적인 규모의 리그가 등장할 수 있었을까. 광안리 10만은 흩어졌다. 불과 2년이 되지 않아 관중 수는 2만 이하로 줄었다. 어쩌면 공허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남아 있다. 이제는 누구도 게이머가 직업이 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는 게임을 e스포츠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세상을 만들었다. 공허의 유산이다.

우리만 모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온게임넷은 전세계 유례가 없던 대한민국만의 일이다. 피시방이 한국적인 현상이었듯, 온게임넷도 한국적인 현상이었다. 거북선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동시에 온게임넷은 인류사적 사건이다. 게임 전문 방송 채널과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은 온게임넷이 인류에게 선물한 창조물이다. 전 세계가 그렇게 본다. 우리만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한 연구는 너무도 부족하다. 하다못해 그럴듯한 자랑질도 없다. 다락방에 쳐박아 놓기엔 너무도 아까운 우리만의 보물이다. 앞서 이 글은 습작이라 했다. 과거를 읽었지만, 그래서 미래도 보인다. 그랬던 그들이 적어도 10만은 되니까. 습작인 채로 세상에 던진다, 그들을 믿으며. 많은 연구와 저작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전한다. 이 글의 유일한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