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시작은 지난 6월 전길남 교수님께서 진행하시는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 kr 4050”에 참여하면서 부터였다. 내년에 열리는 인터넷 40주년 행사에서 90년대 인터넷 비즈니스의 역사를 발표하기로 하고 자료를 수집 중이었다. 실리콘 밸리의 역사 자료를 들여다보다가 많은 자료가 컴퓨터 역사책으로서 하나같이 와이어드 수석 기자였던 스티븐 레비가 쓴 “Hackers: Heroes of the computer revolution”((Levy, S. (1984). Hackers: Heroes of the computer revolution (Vol. 14). Garden City, NY: Anchor Press/Doubleday.))라는 책을 언급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해커스’라는 키워드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검색결과에 해커스 토익, 어학원 관련 책이 너무 많아 찾기 어려웠다. 그렇지… 그 해커스. ‘그럼, 저자 이름과 함께 검색해볼까…’ 저자이름을 키워드에 추가해 검색한 순간, 이 책은 사연 많은 책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어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https://www.tumblbug.com/hackers))에서 스티븐 레비의 “해커, 광기의 랩소디” 재발간 펀딩 사이트에 소개된 네 번째 번역본 프로젝트가 소개되어 있었다.
이 책의 초판은 위에 소개한 대로 1984년에 출판되었다. 또 1994년에는 “10년 이후”란 후기를 추가하여 개정출판되었다. 2010년엔 출간 25주년 기념으로 오라일리 출판사가 다시 출판하였다. ‘그런데 왜 네 번째 번역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우스를 스크롤해 내리니 설명이 나온다. 1991년에 ’과학세대’란 모임에서 번역한 것을 “해커”란 이름으로 사민서각이 출판했다. 1995년에는 과학세대 대표 김동광 씨가 새로 번역한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으로 사민서각에서 재출판 되었다. 하지만 이 출판물들은 정식으로 판권을 얻어 번역출판한 책이 아니었다. 출판사 사민서각은 폐업했고 이 책은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되었다.
2013년, 한빛미디어가 25주년 기념판을 오라일리 출판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해커스: 세상을 바꾼 컴퓨터 천재들(무삭제판)”을 번역 출판했으나, 이 책도 판매가 부진해 절판되었다. 2019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해커, 광기의 랩소디 – 세상을 바꾼 컴퓨터 혁명의 영웅들(복간판)”이 다시 나왔고 이제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다소 시간이 걸려 여러 가지 버전의 책을 구해 서로 비교하며 읽다 보니 이건 마치 역사박물관을 둘러보거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2. 이 책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책 제목에서 해커는 광기어린 천재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해커는 괴상하고 ‘비표준’인 컴퓨터 코드를 작성하는 프로그래머라기보다는 모험가, 선구자, 위험을 감수하는 예술가라 보았다. 초기에 해커들은 평범한 시민의 손에 있는 마이크로컴퓨터가 정보의 힘이 아주 적은 비용으로 대중에게 제공될 수 있는 보다 평등한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 책은 컴퓨터 역사에 따라 변화하는 해커들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메인프레임 컴퓨터 해킹, PC(Personal Computer, 개인용 컴퓨터)의 개발,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 순으로 여러 인물들을 소개한다.
첫 번째 섹션에서 제일 처음 소개되는 해커들은 ’50 ~ 60년대에 MIT의 Tech Model Railway Club(TMRC) 동아리 학생들이었다. 동아리 이름대로 모형 기차를 가지고 전선을 연결하던 학생들은 기술 중심적 사고를 하면서 기술력이 중요할 뿐 학력, 나이, 사회적 지위에 휘둘리지 않았다. 이들 중 기차 모형의 전기 시스템을 다루던 학생들은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기기였던 IBM 704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매료되었다. 이들은 게임의 선각자들이 되어 한 번에 한 시간만 사용해야 하는 고가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게임용으로 쓰기 위해 게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물론 이렇게 해킹되어 개발된 게임 소프트웨어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본래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해커들은 해커 윤리를 만들어 해킹 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는 무료로 나눈다는 해커 윤리를 만들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중앙집중형으로 관리되던 메임프레임 컴퓨터는 점차 누구나 디버깅하고 개선할 수 있는 개방형 시스템으로 변화하게 된다.
1961년 DEC에서 생산된 PDP-1 컴퓨터가 MIT에 기증되었는데 Steve “Slug” Russell을 비롯한 해커들은 Spacewar라는 2D 게임을 고안했다. 두 대의 우주선이 미사일을 쏘는 게임으로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유치한 화면 디자인이었지만, 이 게임을 통해 ‘리얼 타임 프로그래밍’은 엄청난 진전을 하게 되었다. ‘리얼 타임 프로그래밍’이란 컴퓨터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실제로 거의 동시적으로 사람의 요구에 응할 수 있게 된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부분을 읽다 눈에 띄는 점은 당시 미국 동부 대학들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해커들도 양복을 입었으나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디버깅에 바빠 옷은 자주 갈아입지 못했고, 컴퓨터 작업 외에 사회 활동이 거의 없었으며 배달 중국 음식을 즐겨먹었다는 점이었다. 일부 해커들은 위생이 불량하기도 하고 수면이 부족하기도 했다. 이런 개발자 속성이 생긴 게 무려 60년이나 넘었다니!
두 번째 섹션에서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PC 개발 관련 이야기를 다루었다. 기존에 메인 프레임 컴퓨터는 접근 제한도 심하고 자유자재로 고쳐보기 어려웠지만 PC는 그런 제한이 사라졌다. 영화 ‘잡스’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참가한 홈브류 컴퓨터 클럽은 MIT에서 개발된 해커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 클럽은 전자기기 애호가와 해커들이 함께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는 장이 되었다. 이 클럽의 초기 작품 중에는 간단한 멜로디를 재생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클럽 역시 해커 윤리에 따라 장비, 회로도, 소스 코드 등 관련 지식과 정보는 서로 공유되었다. 하지만, PC 시장이 급성장할 거라는 기대와 함께 기업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으며 빠르게 상업화되었다. 홈브류 컴퓨터 클럽 멤버들도 모임에 나오지 않는 이들이 많아졌고 더 이상 지식과 정보는 공유되지 않았고 해커 문화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세 번째 섹션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게임 프로그램 제작에 대한 이야기이다. 80년대 아타리 게임기나 Apple II가 만들어진 후에는 본격적으로 게임들이 출시되었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있어 언제 어디서든 쓸 수 있지만 당시 컴퓨터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이런 컴퓨터를 게임기로 만드는 것은 마법 같은 일이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의 영역인 셈이었다. 실력 있는 개발자들이 파트타임으로 만들기 시작한 게임 프로그램은 점차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사업가들은 이런 게임을 개발자들에게 로열티를 제공하고 게임을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래밍을 하지 못하는 사용자들은 게임 프로그램과 PC를 사서 게임을 즐기면서 컴퓨터 사용 저변은 크게 늘어났다. 게임 소프트웨어 시장이 커지면서 게임 회사들도 만들어지고 이전의 딱딱한 회사 분위기에서 벗어나 캐주얼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만들어졌다. 그러나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에서 비즈니스는 해커보다는 전문적인 사업가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대에 들어서는 회사의 매출이 해커 윤리보다 훨씬 더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게임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허가 없이 소프트웨어가 사용되지 않도록 복사 방지 메커니즘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해커들은 이런 상업적 움직임을 싫어하여 자유롭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공유하는 커뮤니티를 운영하기도 했다.
마지막 섹션에서 저자는 언론에서 해커라 칭할 때는 사악한 국제 스파이 또는 정보를 빼내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묘사하는 현실을 한탄하며 초기 해커들의 윤리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와 같이 해커 커뮤니티에 있다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해커윤리를 가진 수많은 해커들의 주인공인 것이다.
3. Don’t Be Evil
입장을 바꾸어 전통적인 기업의 관점에서 보면, 해커들은 기업의 자산을 본래 목적과 달리 자신의 관심과 이해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한다. 해커들은 이런 과정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을 ‘로빈 후드’처럼 해커 커뮤니티에 나누는 것이 과연 윤리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이런 해커들 중에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구글의 개발자들의 모토가 “Don’t Be Evil(사악해지지 말자)”이다. 이는 나쁜 짓 안하고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해커 윤리가 어느 정도 맥이 닿아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현재의 기업 구글은 과연 사악하지 않은가? 최근 쟁점이 되고 있듯이 구글은 국내 게임 앱 개발사에만 인앱결제 강제 정책을 적용해왔고, 게임 앱에 부과하던 수수료는 중소스타트업 게임회사들이 어려워한다는데도 30% 수수료는 변동이 없다.
이 책의 작가는 미국 IT 및 게임업계의 면면히 흐르는 해커 윤리라는 정신을 포착하여 기록했고 상업화, 자본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 해커 윤리가 쇠퇴하고 소멸하고 있다는 점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온라인 게임의 역사가 20년이 넘어가는 이 상황에 우리나라의 해커윤리는 어떤 상황인지, 그런 개발자 정신이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4. 나오며
몇 년 전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있는 컴퓨터역사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을 방문했었다. 배비지 머신부터 최신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IT 장비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중 상당한 공간이 게임에 할애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 소개된 해커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게임이야말로 컴퓨터의 발전을 이끌어낸 장본인들인 것이다.
또한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형태의 해커가 출현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MMORPG에서 사용자들이 게임사에서 제공한 룰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만의 룰을 만들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태에 대한 연구((McKenna, B., Gardner, L., & Myers, M. (2011). Social movements in World of Warcraft. In 17th Americas Conference on Information Systems.))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World of Warcraft 게임에서 LGBT 커뮤니티 사용자들이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게임룰을 따르지 않고, 캐릭터를 같이 꾸미고 평화롭게 행진하는 행동하는 양상을 분석했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해킹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앞으로 우리가 가진 게임의 해커윤리를 다음세대에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출판된 지 40여 년이나 되는 이 책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