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콘텐츠 규제와 법의 한계
공동체를 지켜내는 힘은 정의와 상식에 기반한 약속이다. 국가의 탄생 이후 그 약속의 대표적인 모델은 ‘법(法’)이다. 우리 헌법은 법을 제정하는 권력(입법부), 법을 집행하는 권력(행정부), 법의 제정과 집행을 평가하는 권력(사법부)을 각 분리시켜 상호 견제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평가받는다.
일반적으로 법을 최소한의 도덕이라 말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 규범 중에서 공동체에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법’의 형식에 담아 이를 따를 것을 강제함으로써 국가·사회의 질서를 유지한다. 정부의 주된 역할도 결국 이 ‘법’을 통해 헌법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국가에서 법이 가지는 존재감은 매우 강해서 어떠한 법의 내용이 정당하다면 그 집행 또한 합리적이고 최선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일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법의 존재와 그 집행은 다른 조건이 필요한 문제이다. 법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 어떤 사회적 현상이나 필요성에서 수용되더라도 정작 이를 효과적으로 집행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수단과 전략 그리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도덕, 상식, 종교, 관습 등 다른 사회규범은 법과 달리 자율성을 가지나 법이 가지는 여러 집행상 한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약속의 영역에서 일종의 사전적인 완충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강제성을 지닌 법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여타 사회규범은 우열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충적 관계에 있다고 볼 것이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는 ‘표현물(콘텐츠)’에 대해서는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금지할 것인지 법의 내용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자칫 표현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표현물에 대한 공권력의 행사에 대해서는 사전검열 금지, 이중기준론(표현의 자유는 경제적 자유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기 때문에 표현 규제에 대한 합헌성 심사에 관하여는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 등 엄격한 잣대를 두고 정당성을 평가한다. 헌법 제21조 제1항에서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는 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로운 표명과 그것을 전파할 자유를 의미하며, 이에 대한 공적규제는 그 유해성과 회피가능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신중하게 이루어질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이처럼 표현물 규제에 대한 신중하고도 제한적인 메커니즘은 역사상 표현물에 대한 자의적이고 과도한 규제가 가져온 폐해에 대한 반성적 산물이다. 특히 오늘날 표현물의 가장 대표적인 공간인 인터넷은 “가장 거대하고 주요한 매체”로서 우리 공동체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가장 참여적인 시장이자 표현 촉진적인 매체”로 평가받으며,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에 대한 규제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을 요구받는다(헌법재판소 2002.6.27 선고 99헌마 480결정). 게임이 표현의 자유로 보호되는 이상 이를 규제하는 공권력 행사는 헌법상 엄격한 심사를 받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표현물에 대한 규제를 논함에 있어 법과 공권력을 기초로 한 공적규제는 자칫 과도하여 정당성을 박탈당하거나 예외적인 경우만 규율이 가능하여 규제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컨대, 과도한 성적 표현을 규제할 필요가 있는 영역에서 법적 규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음란’에 이르지 않으면 금지할 수 없다. 하지만 기술발달에 따라 표현의 방식이나 수단이 다양해져 법적 개념의 적용에 한계가 발생하고 ‘음란’에 이르지 않더라도 청소년 등 특정 대상에 대한 보호, 성적 표현에만 경도되지 않고 다양한 표현물이 발전하도록 유인할 필요성 등 다양한 규제 이익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표현물에 대한 규제에서 그 구성원 내지 피규제자 스스로 약속을 만들고 이행하는 자율규제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2. 자율 규제에 대한 오해와 진실
가. 공적규제와 자율규제
공적규제(행정규제)는 국가나 공공단체가 법규에 기초하여 규제하는 것으로 그 기준과 집행에 대한 정당성이 법치주의와 국가권력의 시원적 정당성에서 확보된다. 자율규제와 달리 공적규제는 기준과 집행력이 법규에 의해 담보되는 것이므로 위반에 대해 행정적·형사적 제재가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적규제는 그 내용과 절차에 대해 엄격한 법치주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사회변화 내지 기술변화에 따른 신속한 대응에 한계를 드러낸다.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입법은 명확성이 더욱 강하게 요구되며, 위반에 대한 제재는 규제 목적 달성을 위한 적정한 수단이며 최소한의 침해를 가지는 수단일 때에만 허용된다는 것은 일찍이 법이론 및 판례에서 정립된 이론이다. 뿐만 아니라 위법의 경계가 모호하고 제한적인 표현물에 있어서는 자칫 적극적 규제가 과잉규제로 위법할 수 있으며, 규제권한을 가진 행정기관의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규제가 발생할 우려도 제기된다.
그에 반해 자율규제는 사업자 스스로 규약을 만들어 준수하는 자발적 규제이며, 사업자가 규제의 대상이 아닌 규제의 주체가 되는 자기책임의 모델이다. 자율규제는 사업자가 이용자(소비자) 보호 관점에서 윤리에 입각하여 스스로 취하는 내적 규제이므로 공적규제와 같은 엄격한 법치주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이는 공적규제에 비해 유연하고 신속한 규제기준을 마련하는데 유리하지만, 공적규제와 같은 법적인 강제력은 통상 수반되지 못한다. 또한, 사업자 스스로 하는 규제이니 규제내용에 대한 이해도나 전문성을 높을 가능성이 크지만 자의적이거나 온정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다. 따라서 자율규제는 참여주체와 절차의 민주성, 투명성, 공정성 등을 어떻게 확보하여 유지하는가에서 정당성이 확인된다.
나. 자율규제에 대한 오해들
자율규제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강제력이 없어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자율규제가 무규제(un-regulation)인 것과 같이 인식하는 것인데, 이는 실효성 확보수단에 대한 지나치게 편협한 이해이다. 오히려 자율규제의 특성상 신속하고 유연하게 시장변화에 대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준수 사항에 대한 사전적 대응은 물론 보다 확장적인 규율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자율규제를 위반할 경우 위반사실의 공표를 통한 신뢰 박탈, 시장 배제(유통 및 업데이트 제한) 등이 일반적인 행정적 제재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오늘날 포털, 오픈마켓 등 플랫폼 사업자를 통한 재화와 서비스 공급이 일반화되고 온라인을 통한 소비자 반응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플랫폼에서의 퇴출이나 신뢰 박탈은 상당한 제재 효과를 가진다. 결국 자율규제는 실효성을 담보하는 수단과 특성이 다른 것이지 공적규제 보다 실효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해당 자율규제의 성격에 맞는 고유한 제재수단을 마련한다면 공적규제 보다 더 효과적인 규율이 가능하다.
두 번째 오해는 자율규제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 금기시 된다고 무조건 선을 긋는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주 거론되는 것이 방송광고의 사전심의를 규정한 방송법 제32조 제2항에 대하여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위헌이라 판단한 사건이다(2008. 6. 26. 선고 2005헌마506 사건). 헌법재판소는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광고를 심의하는 것은 사적 자치의 측면에서 허용될 수 있지만 민간자율심의기구(‘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가 실질에 있어서 행정권력(‘방송위원회’)의 지휘, 감독, 비용지원 하에서 이루러진다면 이는 헌법상 금지되는 사전검열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사건에서 위헌의 징표는 행정기관인 방송위원회가 광고자율심의기구의 구성에 개입하였고, 방송광고심의규정을 제·개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어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가 단순한 민간기구가 아니라 행정주체(‘공무수탁사인’으로 판단하였으며 이는 국가, 공공단체와 함께 행정주체의 하나로 평가받는다)라는 것이다.
자율규제는 위임자율규제, 승인적 자율규제, 강제적 자율규제, 자발적 자율규제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는 자율규제를 순수하게 사업자의 결정과 수단에 의존할 것인지 아니면 국가의 일정한 개입(기준 설정에 대한 국가의 개입, 자율규제 미이행시 공적규제 적용 등)을 부가할 것인지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분류에서 보듯이 자율규제와 공적규제는 이질적이나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규제의 합리화 및 효율화를 위해 조화롭게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민간자율기구에 대한 정부의 적정 지원은 더욱 지지되어야 한다. 자율규제 발전을 위한 정책연구, 자율규제 콘텐츠 모니터링 등을 위한 적정 예산 지원은 자율규제의 성장과 실효성 강화는 물론 구성원인 사업자의 이익으로부터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이라 할 것이다. 각 분야의 다양한 자율규제체계가 성장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를 지켜주는 약속을 유지하는 촉매제가 될 뿐만 아니라 일정 부분 공적규제의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효과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공적규제의 영역을 사전적·선제적으로 담당하는 자율규제에 대한 지원은 단순히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규제 비용에 대한 정당한 대가지급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3. 게임콘텐츠 자율규제의 현상과 진단
대한민국에서 게임콘텐츠산업은 대표적인 규제산업이다. 연령에 따른 게임제공제한(게임셧다운제), 게임 판매를 위한 사전등급 의무(게임사전등급심의제도), 온라인 게임 이용자 신원확인 의무(게임실명제) 등을 비롯해 최근에는 소위‘ 게임중독’에 대해 WHO가 질병코드를 부여하기로 하면서 또 어떠한 제약이 가미될지 예측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2018년 기준 7조 5700억에 이르는 수출액, 8만명이 넘는 고용효과, 증강현실(AR)·가상현실(VR) 등 신기술과의 우수한 접목가능성 등 막대한 산업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불법적인 도박과 동일선에 놓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다. 이쯤되면 「게임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에서 ‘진흥’이라는 단어를 빼고 게임산업‘규제’법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이념적 기초로 이를 구현하기 위해 사업자의 자율규제가 발전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포털에 대한 사회적 책임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정부 규제의 효율성 제고를 목표로 자율규제의 함의를 설정해 왔다. 게임콘텐츠산업은 이미 법적 규제가 사업자(게임사전등급심의제)는 물론 이용자의 자율의 영역(게임셧다운제)까지 후견적으로 깊숙이 개입한 규제과잉의 상태이기 때문에 사업자로서는 자율규제에 참여하고 이를 발전시킬 유인이 약하다. 따라서 게임산업은 자율규제의 실익과 필요성이 큰 콘텐츠산업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공적규제가 게임산업생태계에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자율규제가 일찍이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정부규제에 대한 순응만으로도 숨이 찼을 터이니 자율규제가 발전할 현실적인 기반이 형성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게임의 산업적 가치에 대한 재인식, 과도한 게임 규제에 대한 반성적 기류 등과 함께 게임에 대한 사회 인식이 나빠지지 않도록 자율규제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산업계는 물론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2018년 3월 한국게임산업협회는 문화체육관광부와의 업무협약 체결을 통해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 확대, 독립적인 자율기구 발족, 건강한 게임문화 조성을 위한 대국민 캠페인 전개, 청소년 보호 체계 정비 등 건강한 게임문화 조성과 게임생태계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함께 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2018년 11월 독립된 자율규제기구로서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이하 ‘GSOK’)가 공식 출범하였으며, 이는 게임콘텐츠산업 자율규제에 있어 매우 의미있는 진일보라고 평가할만하다.
그간 게임업계는 2015년 5월 한국게임산업협회에서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자율규제(획득확률정보의 공개)를 시작으로, 2017년 게임문화재단 산하 게임이용자보호센터에 설치된 자율규제평가위원회를 통해 정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보다 투명화된 자율규제를 모색하고, 2018년 GSOK을 통해 강화된 자율규제로 발전시켜나갔다. GSOK은 청·불 게임물을 포함한 모든 게임물의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을 공개하도록 대상을 확대하고, 확률공개 방법은 개별 확률 공개 방식으로 하며, 확률공개 위치는 게임 내 구매화면 등에 사전공지하였다(GSOK 홈페이지 참조). 게임이용자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자율규제를 통한 확률형 아이템 공개 수준에 대해 2017년 60%가 불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이러한 자율규제 강화 노력이후 2019년에는 66.7%가 만족하는 것으로 상황이 반전되었다. GSOK은 2019년 6월에는 ‘청소년보호정책위원회’를 발족하고 청소년이 게임을 이용할 때 발생하는 청약철회, 환불 등 분쟁해결과 정책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9월에는 ‘게임광고자율규제위원회’를 발족하여 게임광고의 과도한 선정적 표현, 허위 광고 등으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한 자율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불과 2년여의 짧은 시간임에도 GSOK 발족 이후 그간 게임산업과 관련하여 제기된 확률형 아이템, 청소년 보호, 선정적 광고 등 부작용 이슈에 대해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4. 확률형 아이템 규제 고시의 문제점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2019년 12월 공정거래위원회는 게임 내 확률형 아이템 획득률을 필수적으로 공지하도록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상품 등의 정보제공에 관한 고시」 개정안을 행정 예고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확률형 상품은 소비자가 최종적으로 어떤 상품을 공급받게 될지 개봉 전에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정보비대칭이 심한 상품이며, 그에 따라 소비자 피해 발생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고려하여 확률형 상품 판매 시 사업자가 공급 가능한 재화 등의 종류 및 종류별 공급 확률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도록 의무화한다는 것이다. 그간 유료 게임과 아이템의 구입 및 이용에 있어 청약철회와 환불문제가 지적되어 왔다는 점에서 정부의 이러한 규제 움직임은 예견된 것이기는 하지만 과연 이러한 공적규제가 확률형 아이템 거래에 있어 소비자를 보호하는 실효적인 최선의 수단인지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제 막 자율규제를 통해 시장의 질서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자칫 자율규제의 싹을 자르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가. 확률 정보 공개 기준의 한계
공정거래위원회가 예고한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상품 등의 정보제공에 관한 고시’ 개정안에 따르면 동 고시 거래조건에 관한 정보에서 “라. 공급 가능한 재화 등의 종류 및 종류별 공급 확률정보 : 소비자가 최종적으로 공급받게 되는 재화 등이 우연적 요소(확률)에 의해 결정되어 소비자가 어떤 재화 등을 최종적으로 공급받을지를 계약체결 전에 알 수 없는 경우에 한함. 다만, 다른 법률에 규정이 있는 경우 그 법에 따른다.”를 추가하였다. 개정안은 확률형 아이템이 포함되는 상품이나 재화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규율하고 있다. 그런데 현물형 상품(예: 랜덤 박스)의 경우에는 상품별로 확률을 정하는 것이 명확하지만, 게임 아이템과 같은 비현물형 상품은 실물형 랜덤박스와 달리 게임마다 운영 방식(확률형 아이템 취득에 따라 확률이 변동되는 방식 등)이 매우 다양하다. 이는 게임의 스토리와 확률형 아이템을 게임내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게임개발사의 기획의 영역으로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다. 다양한 게임콘텐츠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면 더욱 더 개정안에 따른 규제에 포섭하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할 가능성은 커진다. 그럼에도 고시 개정안은 확률 정보의 단순 공개를 의무화함으로써 소비자의 알권리 충족에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공개 방법에 적합하지 않는 서비스가 제약되는 결과를 가져와 자칫 개발사의 창의의 영역을 위축시킬 우려마저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현재 GSOK에서 시행중인 확률형 자율규제는 확률형 정보의 공개를 단순히 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련 사항을 기구내 ‘자율규제 평가위원회’를 통해 그 적정성을 입체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를 통해 확률 정보가 어떠한 조건을 전제로 하는지에 관해 정보 공개를 입체적으로 검증하고, 개발자로 하여금 확률형 아이템에 정당한 룰을 반영하도록 유도하는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정안은 단순히 확률 정보의 공개만을 규정하고 있으나, GSOK은 아이템 결과물의 개별 구성 비율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캡슐형 유료 아이템 기획시 “1. 캡슐형 유료 아이템의 이용 조건이나 아이템의 내용에 대해서 사실과 다른 표시, 게임물 이용자가 오인할 만한 표시를 하는 행위, 2. 캡슐형 유료 아이템의 결과물에 유료 캐시를 포함하는 행위, 3. 캡슐형 유료 아이템의 결과물로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 행위, 4. 캡슐형 유료 아이템의 결과물 중 다음 단계의 게임 진행을 위한 필수 아이템을 포함하는 행위”를 모두 금지하고 있다(GSOK「건강한 게임문화 조성을 위한 자율규제 강령」 제4조). 이와 같은 정보의 공개를 넘어 아이템 기획에 대한 추가적인 규율은 공적규제에서는 경제활동에 대한 과도한 제한으로 허용되지 않을 것이나, 자율규제의 영역에서는 자율규제에 참여하는 사업자들의 자율적인 자정 노력의 일환으로 허용되어 보다 실질적인 이용자 보호 기능을 구현한다. GSOK의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이 같은 자율규제에 대해 국내 개발사의 준수율은 온라인 게임의 경우 사실상 100%에 이르고 해외 개발사도 50% 내외의 준수율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해외 개발사의 경우 공적규제는 역외적용의 집행이 사실상 곤란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고무적인 성과이다.
단순히 확률 정보를 공개하는 것에 비해 게임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불공정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소비자의 권익 보호에 유리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개정안과 같이 정부의 법적 규제가 이루어진다면 사업자로서는 단순히 확률정보의 공개만 이행하면 되고 앞서 설명한 강화된 자율규제를 따를 실익은 사라질 것이다. 결국 자율규제를 통해 형성된 고양된 질서(‘개별 확률’을 ‘게임 내 화면 등에 위치’하도록 하며, 기획단계 아이템 내용 제한 등)가 공적규제로 인해 오히려 하향평준화 되는 역설이 발생할 것이다.
나. 역외 적용의 한계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터넷 서비스 규제는 역외 적용에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국내에 법인을 두지 않은 해외 인터넷 서비스의 경우 적용 대상이 되더라도 관할권의 제약으로 인해 공적규제의 집행이 어렵다. 일정한 경우에 역외적용을 긍정하더라도 영토에 제한되는 국가의 관할권의 특성상 국내 규제가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국제적 마찰의 우려도 있으며, 집행력 확보를 위한 규제 신설이 인터넷에 대한 비규제 원칙에 반하는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하는 제도로 비칠 수 있다. 결국 개정안에 따른 규제는 국내 사업자에게만 적용되는 이른바 역차별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규제산업이라는 오명과 도박과 같은 낙인으로 시름을 앓던 국내 게임 개발사는 다시 한번 사기가 저하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와 같은 역외적용의 한계는 공적규제뿐만 아니라 자율규제의 영역도 공통되는 사항이지만, 자율규제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GSOK은 국내 사업자는 물론 해외 사업자도 모니터링에 포함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자율규제의 준수 책임이 없는 해외 사업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자율규제의 참여와 이행을 구하고 있다. GSOK에 따르면 기구 출범 이후 미준수로 공표되었던 ‘풍신’을 비롯한 몇몇 해외 개발사 게임들이 아이템 획득 확률을 공개하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자율규제 준수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해외 게임 개발사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사)일본온라인게임협회(“JOGA”)와 온라인 게임자율정책 분야 협력을 위한 MOU 체결 등 게임산업의 발전과 상호 교류 증진을 위해 교류협력을 추진하고 있는 바, 이러한 민간의 노력은 국내·외 개발사로부터 우리나라 게임 이용자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실질적인 기반이 될 것이다. 그간 국외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가 우리 정부의 규제 시도에 대해 서비스 철수라는 강수와 비협조로 대응해온 사례를 상기할 때 공적규제에 대한 국내 사업자의 역차별 불만이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국외 사업자도 해당 산업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경제주체로서 산업의 발전과 시장 확대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자율기구의 설득과 협력 모델이 보다 실효적인 방식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는 인터넷이라는 특수성, 전지구적 가상공간에서 국가단위의 행정규제 보다는 자율규제가 가능하고도 적합한 규제수단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5. 정부의 역할 변화를 기대하며
혹자는 금번 개정안에 대해 이미 자율규제로 공개하고 있는 사항이니 그것을 법적으로 강제한다고 하여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정안은 확률 공개의 기준이 불명확하고, 여러 기술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기준을 마련할 경우 실효성이 없거나 개발자의 자율을 과도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점, 단순 정보 공개로 소비자 보호 수준이 퇴행적으로 하향평준화될 수 있다는 점, 해외 개발사에 대한 역외적용 제약으로 국내 사업자에 대한 위축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 등 이미 상당한 부작용이 예상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표적인 국가 규제산업이라는 오명을 들으며 자율규제의 성장이 어려웠던 우리나라 게임콘텐츠산업에서 이제 막 자율규제의 싹을 틔우려는 노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개정안 규제영향분석서에서 ‘확률 정보 공개가 이미 업계 자율규제로 실시되고 있어 규제의 집행 가능성에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대목에서는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민간이 어렵사리 사업자의 공감대를 모아 선도적으로 시작한 자율규제 영역을 마치 정부가 그들의 규제 영역을 경쟁적으로 확장하는 수단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로스쿨 로렌스 레식(Lawrence Lessig) 교수는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요소로 ‘법’, ‘사회규범’, ‘시장원리’에 더하여 ‘코드(code)’를 제시한 바 있다. 소위 4차산업혁명을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 ’법‘에 의해서만 공동체를 규율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법’의 영역이전에 다양한 서비스를 구현하는 ‘코드’에서 이미 통제되고 길들여지는 현상은 ‘법’이 담당해야 할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립을 요구 하고 있다. ’사회규범‘, ’시장원리‘, ’코드‘ 등 법 이외의 규범은 기본적으로 구성원의 자율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반으로 성장하며, 이러한 규범이 성숙되어 갈 때 우리 공동체는 진정한 질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정부영역과 시장영역의 적절한 역할 분담은 필수적이며, 공적규제에 있어 그 비용과 실패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시장이 스스로 질서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정부는 직접적인 규제를 우선하기보다는 자율규제의 역량이 발전하도록 조력하고 지원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오늘날 공적규제는 민간의 자율적 규제 체계와 조화롭게 동행할 때 비로소 목적하는 공익을 효과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